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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5대 근대사를 되돌아보다.

by historytrip 2025. 2. 24.

 

 

한국 근대사, 격변의 시대를 돌아보다

근대사의 문을 연 19세기 후반, 조선은 오랜 성리학적 질서를 뒤로하고 국제 질서 속으로 내던져졌다. 불가피한 변화였지만, 준비되지 않은 조선 사회는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개항, 개혁, 식민지배,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사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주요 사건을 되짚으며, 그 역사적 의미와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고자 한다.

강화도 조약 (1876) - 자주 외교의 실패와 개항의 명암

강화도 조약은 흔히 조선의 개항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여겨지지만, 필자의 견해는 다소 다르다. 이는 개항이 아니라 주권 상실의 첫 걸음이었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접근 방식을 따라 조선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무력을 앞세워 조약을 강요했다. 조선은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했지만, 이는 자주적 개혁이 아닌 외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조선이 외교적 현실을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더라면 어땠을까? 이후 불평등 조약이 연이어 체결되며 조선의 자주권은 점차 약화되었다.

갑신정변 (1884) - 조선은 너무 늦었고, 청나라는 너무 빨랐다

급진 개화파의 개혁 시도는 조선이 이미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3일 만에 무너진 정변은 개혁 세력의 미숙함과 청나라의 압도적 개입이 맞물려 좌절되었다. 필자는 이 사건을 단순한 실패로 보지 않는다. 이후 개혁을 주도할 세력에게 신중함과 현실 감각을 학습하게 한 사건이었다. 조선이 청의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을 배후로 한 개혁은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개화의 시기는 적절했으나 방법이 너무 앞서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1894) - 민중의 각성과 정부의 무능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다. 이는 민중이 근대적 정치의 주체로 등장한 사건이었다. 탐관오리 숙청과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내건 농민군의 움직임은 당시 조선 왕조가 얼마나 민심과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개혁이 아닌 탄압을 선택했고, 일본과 청의 개입을 초래하며 결과적으로 국권 상실을 재촉했다. 이후 농민군의 요구는 갑오개혁으로 일부 실현되었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비극적이었다.

을사늑약 (1905) - 주권의 상실과 독립의 씨앗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불법적인 협약이었다.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을사늑약에 대한 조선 내부의 반응이다. 민중과 지식인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의병을 조직하고, 안중근 의사의 거사와 같은 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즉, 을사늑약은 국권 상실이자, 동시에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다.

3·1 운동 (1919) - 민족의 목소리가 세계로

3·1 운동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이는 한국인이 근대적 국민으로서 독립을 요구한 최초의 집단적 행동이었다. 일본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으나, 이 운동은 국제사회에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은 단순히 외세의 철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3·1 운동은 국민이 주체가 되어야 함을 증명했다.

맺으며 -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거울이다. 조선이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외세의 개입을 허용했던 실책, 개화의 필요성을 외면한 보수 세력의 저항, 민중의 외침을 무시했던 정부의 무능함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근대사의 사건들을 단순한 '과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필자는 근대사의 흐름을 연구하며, 이러한 고민이야말로 역사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